요즈음 북한 문제가 다시 논란의 주제로 부상했다. 어느 정치인이 통일을 포기해야 남북 간에 평화 공존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과연 우리는 2024년 현시점에서 북한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세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첫째, 북한, 남북 관계, 통일과 같은 문제를 논할 때 ‘소망(所望)’만을 말하고 ‘힘(권력)’의 문제를 배제하면 비현실적인 논의에 그치기 쉽다. 유사 이래, 국가 간의 관계에서 열심히 ‘소망’했더니 평화가 이루어졌다는 사례는 없다. 그런 식이었다면 조선의 모든 백성이 열심히 독립을 소망했기에 일제에 나라를 잃는 일도 없어야 했을 것이다. 외침을 막을 ‘힘’을 길렀을 때 평화가 왔다.
정치를 이야기하면서 ‘힘(권력)’의 문제를 논하지 않으면 이상주의에 빠져 잘못된 처방을 내놓게 된다.
개인들 간의 관계에서는 내가 선의로 대하면 상대도 선의로 나를 대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 간의 관계는 개인 관계와 질적으로 다르다. 오래전 미국의 정치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1932)라는 저서에서 그 점을 갈파했다. 국가들 관계에서는 오히려 이쪽의 선의를 저쪽이 악용해서 해를 끼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예를 들어 1938년 9월 뮌헨회담의 경우가 그랬다.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수상은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 영토 주데텐란트의 할양 요구를 들어주면, 히틀러도 더 이상 욕심부리지 않을 것이고 평화가 달성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히틀러는 체임벌린의 그러한 선의를 배신했고, 1년 후 폴란드를 침공해 2차대전이 터졌다. 결국, 힘으로만 불의를 막아낼 수 있다고 믿었던 처칠 같은 지도자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렇기에 북한의 도발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억제력을 강화하는 것은 평화를 해치는 일이 아니라, 평화를 보장하는 필요조건이 된다.
둘째, 우리가 통일 논의를 포기하면 북한도 안심할 것이고, 그래서 평화가 올 것이라는 주장은 문제의 근본 원인을 잘못 짚은 것이다. 왜냐면 한반도 위기의 본질은 남측의 통일 논의가 아니라 북한의 통치 방식과 체제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지금처럼 독재 체제를 유지하고 시장 논리를 무시한 채 자력갱생을 고집하는 한, 북한 주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지고 불만은 고조될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30~40배나 더 잘 사는 민주주의 국가, 한국이 휴전선 바로 남쪽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북한의 권력자들에게는 위협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러한 위협감은 우리가 아무리 통일에 관심 없다고, 그러니 2국가 체제로 평화 공존하자고 외쳐도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평화 달성의 방법은 억제력을 유지하면서, 비정상적인 북한 쪽에 맞추어 우리를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북한을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굴종은 진정한 평화의 길이 아니다. 민주주의와 자유, 인간의 존엄성을 국가 정체성으로 삼고 있는 세계 12위 경제 대국인 우리가, 우리의 가치와 원칙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북한도 점진적으로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설득하는 것이 정도다. 그것이 ‘원칙 있는 포용’의 길이다. 물론 이는 절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원칙’을 포기해버리면 우리의 정체성과 함께 대북정책에 대한 국제적 정당성과 지지기반을 잃게 된다. 반대로 ‘포용’의 노력을 포기해버리면 남북 간 단절과 적대의 길로 가게 되고, 통합과 평화를 위한 구심력은 확보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념할 일은 북한 문제의 가장 일차적인 당사국은 한국이지만, 북한 문제는 이미 국제적인 문제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핵탄두를 장착해 미국을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기 시작한 순간, 북한은 미국의 심각한 안보 문제가 되어버렸다. 그러한 북한 문제의 국제적 차원은 무시한 채, 남북끼리만 잘하면 평화가 온다는 것은 큰 오산이다.
결국 우리가 아무리 열망해도 남북 관계 개선은 북·미 관계 개선 없이는 힘든 게 현실이다. 그리고 북·미 관계의 개선은 한·미 관계가 얼마나 긴밀해지느냐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 남북관계가 가장 좋았던 1998~2000년 3년간은 한국의 김대중 정부와 미국의 클린턴 정부 간의 관계가 아주 좋았을 때였다. 이처럼 남북, 한·미, 북·미 세 가지 양자 관계는 서로 깊이 연계되어 있다. 그렇기에 미국이 그처럼 중국에 각을 세우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균형 외교를 외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에 북·미 관계를 개선하고 한반도 상황을 안정시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편의주의적 발상이다. 외교란 결국 주고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우리의 가치와 원칙을 의연하게 지켜가면서, 북의 도발을 막아낼 억제력을 튼튼히 유지하는 것, 서로가 원치 않는 최악의 우발상황을 막기 위한 대화 채널 가동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통일을 입으로 외치며 실속 없는 논쟁에 몰두하기보다, 멀리 보면서 통일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역량을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키워가는 것이다. 통일이 주어져도,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